그리스 회계사의 푸념
한국에 <안면도>라는 섬이 있다. 충청남도 서해안의 작은 섬이다. 내가 태어난 고향이다. 그 작은 섬에서도 우리 집은 이웃이라고 해봤자 고작 두어 집뿐인 바닷가. 그야말로 ‘깡촌’이었다. 아버지는 장남인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온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지금의 홍대입구에 작은 가게를 냈고, 몇 년 못가서 결국 – 망했다. 바닷일과 농사만 알던 분들이 서울깍쟁이들과 싸운다는 것이 쉬웠겠는가.
많은 장사 중에서 왜 하필 그 가게를 시작했을까? 나중에 들어보니, 순전히 먼저 서울로 올라 온 고향 친구의 가게를 인수했다고 한다. 사돈에 팔촌도 없는 타향에서 <친구>는 얼마나 큰 버팀목이고, 또 얼마나 든든한 응원군이었겠나? 그러니 무조건 믿었을 수밖에.
미국 이민 생활도 마찬가지다.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직업이 결정된다는 말도 있다. 형제자매들이 같은 종류의 가게들을 여럿 하는 손님들이 있는 것을 보면 전혀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세탁소는 우리 한국 사람들이 많이 한다. 지역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네일 가게는 한국과 베트남, 다이너 같은 식당은 그리스, 식료품점은 예멘 같은 중동, 모텔은 인도 사람들이 많이 한다. 택시는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중국 음식점은 중국, 도넛 가게는 캄보디아, 그리고 조경은 통가, 건축업은 헝가리.
내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우리 한국인들의 업종은 정말 다양했다. 그런데 이제는 대부분의 업종들에서 한국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아예 그 업종 자체가 없어진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다른 민족으로 매매가 이뤄진 경우가 더 많다. 이민 2세로 대를 이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말이다. 많은 이민 1세들은 자녀들이 주류 사회에 들어가서 전문직에 종사하길 바란다. 본인들은 플러싱에서 돈을 벌고 있으면서도, 집을 떠난 자녀들이 다시 플러싱으로 돌아오지 않길 기도한다. 피땀 흘려 일궈놓은 많은 한국 사업체와 부동산들이 다른 민족에게 넘어갔고 지금도 넘어가고 있다. 이민 1세대가 씨를 뿌린 비즈니스를 물려받아서 더 키운 성공사례가 있지만, 많지는 않다.
이것은 비단 우리들만의 현상은 아니다. 얼마 전 어느 회계사 세미나에서 그리스 CPA를 만났다. 자기가 처음 회계사를 시작했던 30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 그 많은 그리스 식당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한다. 지난주에도 어떤 다이너 식당이 한국 사람에게 팔리면서 손님이 또 하나 줄었단다. 그리고 “너는 참 좋겠다.”라고 말한다. 글쎄. 한국 사람이라고 꼭 한국 회계사에게 일을 맡겨야 할까? 한국 회계사라고 꼭 한국 손님들만 있으라는 법이 있을까? 비즈니스의 새로운 지경을 넓혀가는 젊은 한국 사람들에게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